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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현진 한화 복귀!!!
류현진선수가 2012년 메이저리그 진출 이후 10년에 한화로 복귀가 확정되었습니다.
계약 수준은 4년에 170억원 규모
이는 김광현이 메이저리그에서 SSG 랜더스 복귀 당시 151억원보다 큰 규모입니다.
류현진선수는 21일 곧바로 오키나와 캠프 합류를 한다는 보도가 있는데요.
류현진은 2006년 KBO리그 한화 이글스에서 데뷔한 이후 2012년까지 한국 무대 통산 190경기 98승52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80의 성적을 남겼습니다.
메이저리그 LA 다저스와 토론토 블루제이스에서 통산 185경기 1055.1이닝 78승 48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27을 남겼다고 나오네요
"'코리안 몬스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류현진 선수는 2006년 2차 1라운드 전체 2번으로 한화의 부름을 받은 이후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에이스였죠.
데뷔 시즌부터 신인왕은 물론이고 다승(18승)과 평균자책점(2.23), 탈삼진(204개) 부문에서 모두 1위에 오르는 트리플크라운의 위업을 세웠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그는 그해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와 최우수선수(MVP)도 휩쓸었다.
이후에도 류현진은 2012년까지 190경기에 나선 그는 1269이닝을 소화하며 98승 52패 1세이브 1238탈삼진 평균자책점 2.80을 써냈다.
토론토와 계약 기간이 끝난 류현진은 자유계약(FA) 자격을 얻고 시장에 나왔으나 그러나 생각보다 FA 시장에서 일부 구단의 제의를 받았지만 류현진 선수를 만족시키기는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두 번의 토미존 수술 경력과 적지 않은 나이도 류현진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한화는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잔류 의지를 최우선으로 존중하고, 꾸준히 교감을 나누며 기다렸고, 그 결과 류현진도 차츰 국내 복귀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네요.
류현진 선수 한화 이글스 시절 경력
2006년, 류현진은 KBO 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KBO 신인왕과 KBO MVP 양상을 모두 수상한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로는 2019년에는 메이저 리그에서 선수 중 처음으로 평균자책점(ERA)에서 최상위를 차지하고 사이영상을 수상한 첫 아시아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해에는 워런 스판 어워드도 획득하여 최고의 좌완투수에게 수여되는 상을 받은 첫 아시아 선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와 야구 팬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리기는 하지만, 류현진은 한국 투수 중에서 박찬호와 함께 언급되는 'Korean pitcher GOAT(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꼽히는 성취를 이뤘습니다.
메이저 리그에서의 그의 기록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투수들 사이에서도 역사적으로 우수한 편에 속합니다. 2020년 기준으로 류현진보다 더 높거나 유사한 승리 기여를 보인 아시아 MLB 투수 중에는 박찬호, 유다르비시, 호노우루 노모, 히로키 쿠로다, 마사히로 타나카가 있는데, 이 중 유일하게 류현진을 능가하는 것은 타나카 뿐입니다. (2020년 기준) 모든 시간 아시아 투수들의 WAR 랭킹에서는 이들이 모두 우투수이기 때문에 류현진은 역사적으로 MLB에서 뛴 아시아 좌투수 중에서 가장 높은 승리 기여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아시아 투수들 중에서는 BWAR에서 4위, FWAR에서 5위에 해당합니다. 또한, 그의 전체적인 평균자책점과 경기 조절 평균자책점은 각각 3.27과 122로, 800 이상 이닝을 던진 아시아 투수 중에서 가장 낮은 ERA와 가장 높은 조절 ERA를 기록했습니다.
류현진은 21세의 나이에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한 기념비적인 순간에서부터 21세의 나이에 캐나다와의 경기에서 완봉승을 차지하고 결승에서 쿠바와의 경기에서 8⅓ 이닝 동안 2점을 허용하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200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프로야구의 인기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 시기에 한국 야구 역사상 중요한 변곡점을 마크한 선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국제 대회의 성공을 통해 프로야구의 인기가 크게 부상한 2000년대 후반의 주역 중 하나였는데, 그 중 가장 큰 성공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이었습니다.
류현진은 또한 KBO 리그 선수들이 MLB에서 경기를 칠 수 있도록 개척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990년대 후반 동열, 2000년대 후반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 등 최고의 한국 선수들이 주로 뛰던 무대는 일본 프로야구였습니다. 그러나 한국 선수가 일본에서 성공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기 때문에 한국 야구 팬들은 일본과 한국 간의 야구 수준 차이를 명확하게 인식했으며, 일본보다 더 높은 수준인 MLB는 그들에게는 세계로부터 상당히 먼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류현진은 선배들의 발자취를 따르지 않고, 2012년 겨울에 메이저 리그 진출 의사를 밝히며 포스팅을 신청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야구 전문가들 중 일부는 이 포스팅 금액에 대해 비관적이었지만, 류현진은 모든 기대치를 크게 뛰어넘는 금액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습니다.
다저스 뿐만 아니라 다른 두 팀도 2천만 달러 이상을 지출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MLB 스카우트와 일부 국내 메이저 리그 전문가들 사이에는 기술과 수준의 차이가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류현진은 어떤 메이저 리그 스카우트들은 심지어 '그는 낮은 수준의 타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지루한 것 같다'고 썼을 정도로 KBO 리그 전체를 지배하는 정도의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류현진은 KBO 리그에서 메이저 리그로 진출한 최초의 선수로서, 단순히 메이저 리그에서 생존하는 것을 넘어서 리그를 대표하는 한 투수가 되었습니다. 그의 활약은 KBO 선수들이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는 기회로 작용했으며, KBO 최고 선수들이 NPB에서 MLB로 이동하는 목표의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그가 실패했다면, KBO 선수들이 MLB로의 길은 완전히 막힐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류현진과 같은 후발주자들이 상위 선수로서 MLB를 대표하기보다는 비참한 실패를 경험한 후에 귀국하는 일련의 사례들이 있었습니다.
한편, 2022년 9월에 메이저 리그 데뷔 10주년을 맞이한 류현진은 공식적으로 10년의 서비스 타임을 기록했습니다. 류현진은 박찬호와 추신수에 이어 10년의 서비스 타임을 달성한 세 번째 한국 선수가 되었습니다.
박찬호와 추신수와 달리 류현진은 KBO를 통해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지만, 10년의 서비스 타임을 달성하는 것은 큰 성취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록 그가 메이저 리그에 비교적 늦게 합류했지만 세계적인 야구 선수들로 가득 찬 메이저 리그에서 오랜 시간을 버텼다는 의미에서 큰 성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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